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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와 젤렌스키 그리고 대한민국?—사회학적 상상력


        



    막스 베버와 젤렌스키 그리고 대한민국?—사회학적 상상력

국제 정치학 모임에서 내놓으라하는 학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푸틴이 국제 적인 하층신분(pariah)으로 전락했다고 한다. 막스 베버가 힌두교와 유대교를 비교하면서 사용한 용어다. 젤렌스키는 CNN과의 대화에서 자신은 푸틴과 언제든지 협상에 응할 준비가 되어있고, 2년 전부터 이러한 입장에 변함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협상에서 실패하고 위험한 생화학무기가 사용 될 경우 푸틴은 3차 세계대전을 해야할 수 밖에 없다. 

 

문제의 딜렘마

2022 4월 해외관계와 이슈를 다루는 전문저널에서 관록있는 정치분석가인 피오나 힐과 앙겔라 스텐은 다음처럼 언급했다. 러시아와 우쿠라이나 협상 팀은 잠정적인 합의를 했다. 러시아는 2 24일 침략이전의 상태로 물러서고, 그 대가로 우쿠라이나는 나토가입을 철회 해야한다. 대신 우쿠라이나는 안전보장을 다른 여러 나라 국가들로부터 합의할 수가있다.  잠정 적 합의가 결렬된 것이 푸틴의 책임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영국 수상 보리스  존슨은 키이우를 방문하고 나토의 국가들은 이러한 합의를 지지하지 않을 것으로 전달했다.

미국 역시 워싱턴의 목표는 러시아를 약화시키는 것이며  협상 테이블이 불필요 하다고 본다. 워싱톤의 목표는 러시아를 크림반도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 국민의 77%가 이제 서방국가는 전쟁 중지를 위한 평화협상을 재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럽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오히려 푸틴이 시도한 평화협상에 젤렌스키가 원칙적으로 수긍을 했지만,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방문으로인해 휴지조각이 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젤렌스키에게도 어느정도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푸틴은 전쟁을 그만두고 싶어한다. 그러나 미국은 푸틴의 체제붕괴를 위해 제한 핵전이라도 불사하려고한다. 젤렌스키는 나토가입을 통해 안전보장을 얻어내려고 하지만 푸틴이 거절한다. 전쟁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막스 베버가 보는 젤렌스키?—표현이 좀 이상하다. 젤렌스키가 베버를 좋아하고 그의 정치 사회학을 공부 했는 지 나는 모르겠다.  이것은 필자가 임의대로 붙인 제목이 아니다. 영국 의 버밍햄 대학의 교수인 프랭크 웨케터 (Frank Uekȍtter) 2022 3월 비디오 토론에서 우크 라이나 전쟁을 베버의 카리스마적 리더쉽이란 관점에서 논의했다. 1919년 베버의 강연 소명 으로서의 정치를 검토하면서 웨케터는 정치지도자와 전쟁문제를 다루었다.

판데믹 시대에 미디어는 공론장으로서 교육과 중요한 정치현안에 대한 강연과 토론을 주도한다. 특히 미국에서 공공신학은 미디오 공론장의 논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정직하고 바른소리를 하는 파레시아를 소중한 담론윤리의 덕목으로 간주한다.

내가 보기에 웨케터의 논의에서 베버의 카리스마적 리더쉽은 비스마르크의 관료정치를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베버가 정치가 개인의 영웅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문제로 남는다. 웨케터 교수가 젤렌스키를 카리스마적 리더쉽을 통해 윈스톤 처칠로 연결짓는 것은 별로 바람직 해보이지 않는다.

베버는 비판적 자유주의자로서 사회주의 혁명이후 러시아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개인 영웅적인 카리스마 지도자의 모습에서 베버 비판가들은 결국 바이마르 공화국의 의회제도가 1933년 히틀러의 전제지배로 넘어가는데  단초를 제공 했다고 문제 삼는다. 물론 베버는 의회 민주주의에서 카리스마적인 민중선동을 통해 케사르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의회 민주주의를 케사르주의로부터 방어하는 사회 과학적 반성이 미약한 것은 그의 아킬레스 건이기도 하다.         

 

배버의 전쟁이론과 폭넓은 영향

막스 베버와 젤렌스키에 대한 사회학적 상상력은 카리스마  정치 지도력 보다는 베버가 전쟁을 일차적으로 어떻게 보았는 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전쟁 사회학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분석하는 데 도움을 주고 젤렌스키의 지도력을 민족주의와 근대국가와 관련해서 보게 해준다. 베버가 1905년 러시아 혁명을 연구했을 때, 우크라이나 연방주의자인 드라고마노프의 영향을 받았다. 후자에 의하면 러시아 제국은 자신의 지배 블록 안에서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와 같은 개별국가들에게 상당한 정도로 문화적 자율성을 허락해야한다. 동시에 국제정치의 힘의 질서로 인해 소수의 연방국가들은 러시아 제국의 보호 아래서 생존 할 수가 있다.

이런 점에서 극단적인 민족 분리주의자들의 입장은 거절된다. 열강들 간의 힘의 균형 만이 소수의 연약한 국가들의 자유와 주권을 보장해줄 수가 있다. 이런 국제 정치관점에서 베버는 1917년 독일의 군사적 보호아래 폴란드의 민족국가의 설립을 지지했다. 이러한 입장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세계와  공산주의로 갈리는 진영 이데올로기 즉 냉전시대의 논리에 적합했다.

베버의 영향의 스텍트럼은 매우 넓다. 흔히 좌파이론가들이 베버를 애써 폄하하고 그를 하찮은 부르즈와 정치가나 아니면 히틀러에게 복무했던 법학자 칼 슈미트의 스승 격으로 비난 한다. 왜냐하면 베버의 러시아 혁명비판이 이들에겐 응어리로 남아있어서 그럴 것이다. “프로 렐타리아트 독재?—천만에, 공산당을 통한 관료제의 독재가 러시아를 결단 내버릴 것이다.”  베버의 러시아 사회주의 비판의 골자이다. 그리고 적중했다.

베버는 칼 슈미트와 상관이 없고 오히려 게오르그 루카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헤겔과 베버를 통해 루카치는 마르크스를 새롭게 읽었다. 그리고 베버는 특히 막스 호르크 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 중요한 자리를 갖는다. 더우기 하버마스가 그의 소통이론 1권에서 벌인 베버와의 이론적 대결은 볼 만한다. 그러나 베버의 국가론과 관료 제 비판, 민족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한 분석은 하버마스에게 별 다른 주목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베버의 법 사회학을 살펴보면 그는 사회 계약론과 공화제 민주 주의 전통에 서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주의와 근대국가의 문제를 다룰때 관료제 분석은 탁견에 속한다. 이런 점에서 베버는 비판적 민주주의자로 자리매김된다. 사실, 베버는 진보 좌파 든지 아니면 자유 민주주의자인든 지 뜷고 지나가야할 시험대에 속한다.

 

우쿠라니아 전쟁의 계보학

미국의 정치학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2014년 오바마 정부의 국제정치의 부산물로 본다. 완충국가를 세워서 나토의 확장과 더불어 리버럴 세계질서를 확립하면서 러시아를 둘러 싸는 봉쇄전략이다. 러시아의 푸틴으로서도 존재론적인 위협을 느끼게 된다.  2004년 오렌지 혁명에서 선거부정으로 인해 친-러시아 정치가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인 친-유럽 성향의 빅토르 유센코에게 밀려났다.

그러나 이후 재기에 성공한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2013년 유크라이나와 유럽연합의 협정서를 거절하고 친러시아 정책으로 돌아섰다. 2013년도와 14년 사이에 일어난 시민저항 운동에서 급기야 정부건물이 시위대에 점령당해 경찰과 대치과정에서 80여명이 사망 하자 결국 의회는 야누코비치를 대통령직에서 탄핵하고 해임시켰다. 러시아로 도피한 야누 코비치를 보호하면서 푸틴은 시민저항을 쿠데타로 규정하고 2014 3월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합병시켰다.

2019 4월 젤렌스키가 대통령 선거를 통해 70% 이상의 지지율을 얻으면서 정계에 등장했다. 그러나 2020년 테헤란에서 키이우를 운항하는 우크라이나 비행기가 이란 혁명 수비 대에 의해 격추당해 176명의 승객전원이 사망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 되었다. 2021년 대통령의 명으로 친러시아 방송 프로그램이 중지되고 푸틴의 지지자들과 특히 푸틴의 대부인  빅토르 메드베츄크와 그의 아내에게 제재가 가해졌다. 2021년 브뤼셀 정상 회의에서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의 가입을 허락했고, 2020년 우크라이나는 회원가입 신청서를 냈다. 그러나 2022 2 21일 러시아의 푸틴은 전면전을 개시했다.

대략 이 정도가 전쟁의 역사적 배경이 된다. 시카코 대학의 저명한 국제 정치학자인 존 미어샤이머는 푸틴의 무모한 전면전을 비판한다. 동시에 오바마 정부시절  우크라이나를 러시 아의 완충국으로 만들어 러시아의 힘을 소규모의 영토에 국한시켜려 했던 전략에 날카로운 각을 세운다. 이일로 전쟁이 일어날 경우 국제법 차원에서 더 이상 전쟁을 해결한 중앙 집권 적인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UN이나 유럽연합 역시 무력할 수 밖에 없다. 모두 다 개별  연방국가들의 전략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고, 여기에 군산 복합체와 의약품과 식량을 공급하는 다국적 기업의 엄청난 비즈니스가 호황을 누린다. 약육강식의 세계가 국제 정치 관계에서 가장 리얼하게 드러나는 현장이 범죄로 얼룩진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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